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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ga, Ani/만화가, 제작자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1901.12.5 ~ 1966.12.15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1901년 12 월 5 일 ~ 1966 년 12 월 15 일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 1901 년 12 월 05 일 - 1966 년 12 월 15 일 )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에서 태어난 애니메이터, 프로듀서, 영화 감독, 극작가, 성우, 연예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캐릭터 '미키 마우스'의 창조자이며, 형 로이 디즈니와 공동으로 설립한 월트 디즈니 회사는 350억 달러의 수익을 가진 국제적인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유니온 퍼시픽 철도 철도원 이라이어스 디즈니의 아들로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라이어스는 원래 캘리포니아주에서 금광을 찾으며 살고 있었지만, 아내 플로라를 위해 일정한 직업을 찾고 캔자스와 플로리다로 옮긴후에 일 관계로 일리노이주 시카고로 이주 했다. 월트 디즈니는 어릴때 삼촌 로버트 디즈니에 맡겨져 미주리주에서 소년기를 보내는 일이 되었다. 디즈니 일가의 밭근처에는 산타페 퍼시픽 철도가 달리고있어 그 기차가 달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아르바이트로, 철도구내에서 신문이나 팝콘을 파는 일을하고 있던 적도 있다. 후에 월트 자신의 집에서 8 분 의 1 스케일 모형 철도를 정원에 달리게해 그 미니어처 기차를 타고 노는 것이 월트의 취미였다.


소년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와 예술 자체에 매우 흥미 있어해 7 살때 자신이 그린 작은 그림을 이웃에 팔고 있던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동물과 자연등의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은 아버지가 신문 배달 일을 시작 했기 때문에 형 로이와 신문 배달을 도왔다. 1911년에 캔자스시티에 이사 하면서 회화교실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울 수있는 기회를 얻었다.




사춘기
적십자 위생병으로 활동한 월트 ( 프랑스)
아버지가 시카고에서 공장 경영을하며 다시 가족은 시카고에 되돌아 오게 되었다. 사춘기였던 월트는 맥킨리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아카데미 오브 파인 아트' 야간부에서 그림을 배우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 에서 학급 신문의 만화 섹션을 담당하고 그 재능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애국주의에 따른 내용 이었다. 당시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에서도 애국 국민들 사이에 높아지고 있었다.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제 1 차 세계 대전이 발발, 미국이 전쟁에 참전 하면서 애국심에 사로잡힌 월트는 고등학교와 예술 학교를 퇴학 하고 육군에 지원한다. 설득 되어 군인으로 근무대신 적십자 위생병으로 부상당한 병사의 치료 및 수송에 종사했다. 전쟁 종결시 폐허가된 프랑스에 있던 월트는 일년만에 고향 미국으로 귀국했다.


귀국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 이외에 직업을 찾는것을 희망했던 월트는 집을 나와 캔자스 시티에 돌아왔다. 만화가로서의 활약을 목표로한 월트는 우선 신문 만화를 그리는 일을 하청 했다. 하지만 당시는 일개 신인에 불과 월트의 작업 요청은 많지 않고, 성공 은커녕 일상 생활에도 곤란한 어려운 시대를 보내고 있었다 . 보다 못한 동생 로이( 현지 은행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 지인을 통해 루빈 상업 미술 스튜디오에서 광고 디자인 작업을 월트에게 소개했다. 월트는 여기에서 평생 친구가 될 어부 아이웍스 (Ub lwerks)와 알게 되었다. 아이웍스와 월트는 이듬해 아트 스튜디오에서 계약 갱신을 중단 하고 실직하면 둘이서 새로운 창작 활동을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만화에서 애니메이터로 전진
1920 년 1 월, 월트 디즈니와 아이웍스는 디자인 회사 '월트 아이웍스 컴퍼니' 를 설립하고 동업자가 되었다. 하지만 설립후 월트는 아이웍스를 두고 캔자스 필름사에 애니메이터로 고용되어 버려 회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고용된 월트였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담당하는 가운데 애니메이터 로서의 자질에 눈을 떠가고, 만화 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관심이 옮겨 갔다. 영상 제작을 위한 장비를 차입 하여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 지금까지의 자르기 방법에서 셀 애니메이션에 높은 가능성이 있는 것을 확신 했다.


1920년 독립 하여 개인 사무소를 설립한 월트는 프리랜서 제작자로서 일을 모집, 캔자스 시티의 사업가 프랭크 뉴먼이 투자해 최초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작품 '뉴먼 극장 개그 만화'을 제작했다. 양질의 오락 작품 은 좋은 평가를 얻고, 월트는 애니메이션 제작 작업이 순조롭게 되었다. 개인 제작으로 사업 확장을 따라가지 못할것으로 판단한 월트는 개인 사무소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로 회사를 확장 할 수 있도록, 아이웍스를 비롯한 몇명의 애니메이터 동료를 불러왔다. 20세의 월트 에게 첫번째 성공이 되었지만, 제작에 몰두해 자금이 혼란스러워 결국 스튜디오는 파산 했다. 파산후 정리를 마친 월트는 재기를 도모하고 영화 산업 의 본고장 할리우드로 이주 했다.




디즈니 회사 설립
할리우드에서 형 로이 디즈니와 함께 캔자스 시대에 제작한 '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시리즈의 속편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 '디즈니 브라더스사'를 일으켰다. 사업 과정에서 앨리스 시리즈의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드는 기회를 얻은 월트는 이전과 같이 애니메이터 동료를 모아 디즈니 브라더스사는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로 전진 했다. 이것이 실질적인 '디즈니 회사'의 설립으로 로스 앤젤레스시 시내 북쪽에 개설된 제작 스튜디오는 1939년 버뱅크 이전에 따른 폐쇄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계속 됐다.


실사에 애니메이션을 혼합한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 '는 인기를 얻어, 디즈니사의 경영은 궤도에 올랐다.

1925 년 , 회사의 직원이었다 릴리안 바운즈 ( Lillian Bounds )와 결혼, 두딸 다이안( Diane )과 샤론 ( Sharon )을 낳았다. 1927 년 찰스 민트의 소개로 유니버설 픽쳐스와 연결을 얻은 월트는 자신 캐릭터로 '행복한 토끼 오스왈드 ' 를 고안, 오스왈드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유니버설 배급으로 제작했다. 오스왈드 시리즈 시작과 동시에 아이들 사이에서 대히트를 하여 일약 디즈니사의 약진의 계기를 만들었다. 월트는 캔자스 필름 시대의 옛 친구를 잇달아 회사로 초대하여 디즈니사는 미국에서도 굴지의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로 급성장했다.


하지만 1928 년 2 월 찰스 민트와 계약 비용의 거래에 임했던 월트는 거기서 큰비극에 휩쓸렸다. 민츠는 유니버설사에 엄청난 배급 수수료를 지불해 다양한 분리 공작에 아이웍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애니메이터 들이 따라 버린 것이었다. 계약상, 오스왈드가 배급 회사의 관리하에 놓여 불리하게 일하고 디즈니사는 배급사와 자사 캐릭터, 그리고 직원의 대부분을 잃고 파산 직전에 몰렸다. 그러나 월트는 포기하지 않고 젊을때와 마찬가지로 아이웍스와 디즈니 재건에 착수 하게된다.





미키 마우스
재건함에있어서 오스왈드를 대체할 새로운 자사 캐릭터를 필요로 느꼈던 월트는 그때까지도 토끼 오스왈드 와 앨리스 코미디에서 라이벌로 종종 등장 시키고 있었던 악역의 쥐를 주역으로 발탁 하기로 결정 한다. 아이웍스의 스케치는 오스왈드 같이 캐릭터가 되었다. 당시 ​​감독이나 연출에 전념 하기 시작했던 월트에서 작화 감독을 위임받은 아이웍스, 월트의 원안에 이동하는 것을 염두에둔 어레인지를 더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진 '미키 마우스'는 완성되었다.


원래 이름은 '모티마'라고 될 예정 이었지만, 아내 릴리안 디즈니의 아이디어로 '미키 마우스'라고 변경 되었다. 모티마의 이름은 후 초기 작품에서 미키의 라이벌 캐릭터에 사용되었다.




디즈니 랜드
1955 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서 150 에이커의 땅을 구입. 자신의 이름을딴 테마파크인 '디즈니 랜드'를 개설하여 현재까지 계속 다각적인 경영의 기반을 만들었다. 


1965년 월트는 미국 도시의 삶의 질을 문제로 주목하기 시작, 미국 산업의 독창성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엡 코트라는 이름의 공원 을 디자인 했다. 후 플로리다의 중심에 맨해튼섬의 2 배 정도나되는 광대한 토지 를 사고 디즈니 랜드, 호텔등을 도입한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망
1966 년 12 월, 폐암으로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의 완성을 보지 못한채 사망했다. 이듬해 마지막으로 다룬 유작 '정글 북'이 공개 되었다. 만년에는 술에 빠져 아침 식사로 도너츠를 스카치 위스키에 찍어 먹는 것을 가장 좋아 했다.


월트 디즈니 개설전에 '언제든지 청소가 잘되어 있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꿈의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현재 디즈니 랜드의 토대가되고 있는 중요한 사상이며 실제로 다른 테마파크에서는 아무런 특색도 없이 행해지고있는 지상 청소도 디즈니 랜드에서 마치 하나의 쇼처럼 여구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월트 디즈니의 오픈시의 연설에서, '나는 디즈니 랜드 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장소, 어른도 아이도 함께 생활의 경이와 모험을 체험 하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즐길 수있는'이라는 패밀리 엔터테인먼트의 이념은 지금도 각 디즈니 파크에서 계승 되고있다.